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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한석규 부인(아내) 임명주와 자녀 이야기


한석규 부인(아내) 임명주와 가족사 이야기

한 가정의 아버지로 산다는 건...


이름만 들어도 시청자들에게 신뢰를 주는 배우 한석규, 어느덧 데뷔 26년차인 그는 톱스타라는 티를 내지 않고 늘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어떤 역할을 맡더라도 감동을 전해주는 배우 한석규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시죠.



한석규 프로필 그리고 데뷔 "배우 포기했었다"



강변가요제 한석규


한석규 나이 51세(1961년생)로 1984년 MBC 강변가요제를 통해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당시 대학가요제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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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덧마루의 멤버로 참가하였는데(한석규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 한석규 고등학교 용문고등학교)그 시절 연극영화과는 배우는 물론 음악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입학했죠.(장려상 받음, 한석규 키 178cm로 당시에는 엄청나게 큰 키)



이후 한석규는 학업과 연극을 병행하며 배우로서의 꿈을 키우게 됩니다. 그러다 군대를 갔는데(이기자 부대)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의가사제대를 했고 연기자의 꿈도 포기했다고 하죠.(외모에도 자신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차선택으로 정했던 직업이 성우였습니다.(평소 한석규 목소리 좋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시험에 합격하여 1990년 kbs 성우 공채22기로 입사하게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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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릴때부터 키어 온 배우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어릴 때 한석규 꿈은 성악가 였으나 이를 포기하게 됐고 배우라는 비슷한 직업을 선택함) 



(어머니가 극장에 자주 데리고 간 것이 영향을 많이 받음) 운명이었을까요? 정말 다행히도 수술을 하고도 좋지 못했던 허리가 시간이 지나고 많이 회복됐다고 하죠. 그리고 결국 MBC 공채 탤런트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공채 20기) 배우로서 데뷔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1991년)



한석규 성대모사 지랄하고 자빠졌네


한석규 명품배우로 거듭나다.



한석규는 성우 시절 혹독한 발음, 발성 연습을 하였다고 합니다.(사전을 들고 다니면서..) 이 때문에 대사 전달이 뛰어난 연기자라는 평을 받아 빠르게 비중 있는 역을 맡아 빠르게 가능성 있는 배우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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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한석규 씨의 연기에 대한 열정도 빠질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청춘', '여명의 눈동자'란 드라마에서 조연, 단역을 시작으로 1992년 '아들과 딸'에서 좋은 연기를 인정받았죠.(한석규 출연료도 엄청나게 오름)



그후 1994년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X 아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여(한석규 씨가 옷을 벗고 뛰는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시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명실상부 톱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50% 가까운 시청률)



한석규 한국영화 제2의 전성기를 이끌다.



이후 한석규는 활동 무대를 충무로의 스크린으로 옮겼습니다. 영화 '닥터 봉'을 시작으로 '은행나무 침대', '초록물고기', '넘버 3',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1960년대 이 후 침체기였던 한국영화 산업을 배우 한석규와 강제규 감독이 한국영화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3년간의 공백기 내겐 득이 었다.


한석규 3년간의 공백기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2000년~2002년 공백기


그렇게 전성기시절은 누리던 한석규는 2000대 돌연 3년간의 공백기간을 가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를 의아해 하며 궁금해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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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 날 한석규는 이에 대해 당시 자신의 연기도 그렇고 한국 영화계 전반적으로 거품이 많았다며 휴식이 좀 필요한 시기라 쉬었다며 공백기를 가진 이유를 밝히기도 하였죠.


어떨 땐 배우라는 일이 하찮게 느껴진다.

그리고 힐링캠프에 출연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당시 영화를 계속 찍었다면 배우 한석규란 사람이 형편 없어 졌을 것이라며 당시의 시간은 오히려 나에게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하였죠.

이를 보아(모르긴 몰라도) 당시 주식이다 뭐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였는데(지금도 그렇지만) 상업적으로(돈으로) 한석규 씨를 이용 혹은 휘두드려고 하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내 일이 의미있는 작업이었을까?

어찌 됐든 한석규는 3년 만에 복귀하여 지금까지 위로의 아이콘으로 국민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는 배우로 활동하고 있죠. (물론 흥행 실패작도 많지만(특히 한석규 이은주 '주홍글씨')'바른 사람', '국민 배우'란 타이틀은 여전하였습니다.)



한석규 아내 성우 임명주 사진


한석규 아내 임명주 이야기



한석규 씨는 워낙 인터뷰를 잘 안하기로 소문난 배우입니다. 웬만해서는 자신에 대해 특히 한석규 가족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스타죠.


그래서 한석규 임명주 부부가 정확하게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한 열애 스토리를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두 사람은 1989년 한석규 씨가 성우로 활동할 때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당시 임명주는 한석규보다 앞서 성우로 활동하고 있었다고 하는데(한석규 부인 임명주 직업) 사수로서 한석규를 담당하게 되었죠.(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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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한석규가 배우의 꿈을 버리고 성우라는 직업을 가졌을 때 만난 것인데 모르긴 몰라도 이때 한석규는 인생이 있어서 위기였을 텐데 아내 임명주 씨가 곁에서 지켜주며 사랑을 키워 오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그후 두 사람은 3년 열애 끝에 백년가약을 맺게 됩니다.(어떤 기사에서는 10년 열애 끝에 결혼했다고 하는데 친구사이로 지내다 연인사이가 된 것 같습니다.) 이때가 1998년 이었죠.



다복한 집안에서 자랐던 두 사람


한석규 아들 딸 유학, 기러기 아빠되다.



그렇게 결혼한 두 사람에게는 현재 2남2녀(딸 딸 아들 아들 순으로)의 자녀가 있습니다.(결혼전부터 아이욕심이 많았음)


평소 아이들을 위해 성우시절 경험을 살려 동화책도 읽어주고, 요리도 해주고, 취미인 낚시도 같이 다니며 작품 속 카리스마있는 모습과는 달리 가정적인 아버지로서 지극정성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하죠.



언젠가 한석규는 자신의 인생에서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기러기 아빠를 자처하며 2009년 가족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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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 가족이 유학을 간 곳은 미국 오렌지카운터 어바인 지역이라고 하는데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 1위로 선정된 곳으로 치안과 경제수준, 교육수준이 매우 높은 곳으로 한 마디로 미국의 팔학군 중 한 곳이라고 합니다.


(손지창 오연수 부부, 김흥국 자녀도 이곳에서 공부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휴식기를 가질때마다 종종 미국으로 건너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하죠.



이런 가정적인 모습이야말로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한석규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원동력이 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최근 한석규 씨는 정말 오랜만에 TV드라마(낭만닥터 김사부)로 시청자들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한석규 연기력 하면 믿고 보기 때문에 기대가 큰 상황이죠. 앞으로도 좋은 모습으로 한국 영화계 역사의 한 사람으로 길이길이 기억되는 스타로 남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